11월 1일 토요일자 한겨레에 실린 '정희진의 어떤 메모'를 읽었다. '희망은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제목을 달고 타계한 기형도 시인의 <기형도 산문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희진은 "내게 '희망'의 이미지는 상술, 무임승차, 불신이 느껴지는 위로, 네온사인 십자가 등이다. 문자 자체로도 희망(希望)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나는 단어가 주는 가벼운 무게감, 책임을 어딘가에 전가하는 듯한 회피, 타인의 목소리가 베재된 듯한 애매모호함 등의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목까지 차올라 '희망'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희망'과 동급으로서 (이게 없다면 절망밖에 남지 않을거야라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투로) 머지않아 찾아올 밝은 미래를 떠오르게 하는 '꿈'과 '기적'도 신중하게 선택하고 싶은 대표적인 단어들이다. 왠지 이 단어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스몰사이즈 또는 빅사이즈 옷을 입은 기분과도 같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 대뜸 "어때? 나랑 잘 어울리지?"하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대신 글로 쓰는 건 말보다는 쉬운 편이었다. 비영리 기관에서 일하면서 주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나 슬로건을 써야할 때 주저없이 '희망'을 언급했다. 맨 마지막 부분에는 '희망'이라는 메시지로 결론지어야 할 것 같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내세워 '여러분이 희망을 전해주셔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쳤다. 

 

 

"기형도가 살았던 1980년대에 비해 지금 사람들의 욕망은 하늘을 두 쪽 낼 만큼 강렬하다. 실현가능성은 그 반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을 만큼 노력하거나 노력해봤자 불가능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대의 희망은 통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대중은 '착해 보이는 말', 희망으로 대응한다. 현실은 물질이고 희망은 생각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희망'은 더 많은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된 단어였다. 어쩌면 별다른 고민없이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착한' 단어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허나 뒤돌아보면 목표한 모금액에 달성하기 위해 '희망'을 너무 남발했다는 생각이 든다. 치료비가 필요하고, 일자리가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고, 생활비가 필요하고, 병원이 필요하고 등 모금이 필요한 수많은 이유들과 내용들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두리뭉실 포장하지 않았나. '희망'은 아니 '희망이라는 단어'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이 위대하고 신성한 목표를 이루는데 사람들의 '작은 정성'으로 기꺼이 동참할 수 있도록 시선을 집중하는 힘을 가질 수 있음을 알았기에.

 

 

"희망은 바라는 것이므로 어차피 현재에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희망'의 문제는 두 가지다.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맞다. 하지만 희망과 현실을 대립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이런 좌절이 오는 것 아닐까. 현실의 일부인 '어두운' 현실을 드러내면 희망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세월호는 이제 그만" 같은 논리가 대표적이다."

 

 

"희망과 현실의 간극이 클 때 우리는 절망한다. 절망에 대처하는 가장 위험한 방법은 희망이 인식이 되어 그 인식을 행동으로 옮길 때다. 나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 치유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명절 인사처럼 "모든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너무 쉽게 '희망'을 꺼내들었다. 조직에서 벗어난 개인이었다면 망설이다 못해 쓰지 않기로 유보하거나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조직에 소속되어 조직의 입장을 매끈하게 드러내야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서 변명을 하자면, 도움을 필요한 상황에서 이러한 도움이 무엇을 가져올 수 있는지 단번에 드러낸다는 판단에서 '희망'은 쉽게 쓰게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대다수의 비영리 기관들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단어는 '희망'과 '꿈'이다. 그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써야지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 또한 이해한다.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밀려있는 서류를 제 시간에 처리하듯, '희망'을 상실하게 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뼈저린 고민 없이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관한 고민 없이 단지 겉으로만 '희망'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끔 장애어린이의 엄마 아빠를 만나 인터뷰할 때면 자연스레 그런 질문들이 튀어나온다. "아이의 꿈이 뭐에요?", "치료를 통해 변화를 체감하시나요?"와 같이 지금 빨리 해달라고 보채는 사람마냥. 이런 질문에 엄마 혹은 아빠는 담담하게 말한다. "아이가 지금처럼 치료받아서 잘 걸었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나중에 커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래요."라고.

 

 

질문의 의도에는 그럴싸한 말을 듣기 위해 '무언가를 바라고 있잖아요', '거대한 변화를 바라고 있잖아요'라는 재촉이 담겨있다. 하지만 곧바로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장애어린이의 가족에게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사자가 말하려는 것을 무작정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한 단어를 매일같이 사용하면 실제 그 단어가 담고있는 의미가 사라지는 것처럼, 별다른 고민없이 '희망'을 말하고 쓰는 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은 없었을까.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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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브앤난나 트랙백 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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